시적 인간 (homo poeticus)

 - 유성훈의 작품 세계 

 

                                                                                                                   이진명

                                                                                                                            미술비평가

   유성훈 작가의 영상에 대해서 한마디로 단언한다면 매우 시적(poetic)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 자체가 시적이다. 시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우선 설명해야겠다. 노자의 첫 문장은 누구나 알다시피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다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로 시작한다. 12자로 이루어진 이 문장보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직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진리는 문자와 수식으로 이루어진 코드(alphanumerical code)이다. 세계라는 현상을 우리의 이성, 즉 언어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믿음 체계를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믿음 체계도 시대의 패러다임에 의해서 언제나 바뀌었음을 안다. 가령, 무지개가 있다. 옛사람들은 무지개[虹]를 거대한 뱀이 만든 것이라 생각하여 ‘벌레 훼(虫)’와 ‘장인 공(工)’을 붙여서 형상화했다. 음양오행설이 생기면서 이후 사람들은 오색영롱하다고 표현했다. 근대 과학이 프리즘을 발명하면서 일곱 가지 색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무지개는, 우리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입체와 파동이 수분 머금은 대기를 통과해서 만든 장관이다. 우리는 무지개를 알 수 없다. 우리는 현상의 일부분을 제한적으로 인식해서 바라볼 뿐이다.

 

   이러한 제한적 인식은 매우 편안하다. 편하고 따뜻하다 못해 포근하다. 이불 속에 누워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불이 들춰지는 순간이 있다. 이를 ‘디스-커버(dis-cover)’라고 한다. 즉, 이불을 들추는 순간이다. 바로 무언가를 발견(發見)한 상태이다. 이불 속의 상태는 누운 상태이기 때문에 수평적 상태이다. 그리고 수평적 시간이다. 이불과 같은 커버를 들춰버리면 나도 일어나게 되기에 수직적 상태가 된다. 바야흐로 수직적 시간을 갖게 된다. 수평적 시간은 일상적 시간이다. 일상적 언어로 세계를 파악하는 시간이다. 일상적 언어는 관습 · 상식 · 특정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이다. 관습 · 상식 · 패러다임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그런데 일상적 언어 너머의 현상이 다가오게 되어있다. 기존의 편안한 틀로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이 다가올 때 발견이 생기고 추위에 고통을 받게 된다. 이때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한다. 새로운 언어는 추위를 막는 새 이불이다. 새로운 언어를 찾는 시간을 시적 시간이라고 한다. 기존의 인식 평원과 새로운 현상이 충돌해서 평원은 높이 융기하게 된다.

 

   시적 시간은 비누를 처음 뜯었을 때 느낌과 같다. 밀봉되어 평이하고 편안했던 느낌이 공기와 만나면서 새로운 향기로 가득 퍼지게 된다. 진정한 느낌이다. (authentic)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시적 시간에 느꼈던 그윽한 느낌과 향취는 설명(description)으로 풀어지게 된다. 설명은 사용과 같다. 사용은 비누의 거품과 같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닳아 없어진다. 진정한 느낌은 어처구니 없음(absurd)으로 바뀐다.

 

   <한줌의 머리(A Lock of Hair)>라는 작품이 있다. 370cm의 머리카락 형상인데, 작가는 황동선을 엮어 제작했다.

 

                                                            잠이 든 사이,       

                                                          머리 한 줌 잘라, 

                                                          당신에게 바친다.    

   여기에서 잠든 시간은 대상인 누군가가 잠든 시간이다. 그 대상은 연인일수도 가족일수도 있고 익명의 다수일수도 있다. 대상이 잠든 사이 나는 깨어있다. 존재의 조건이 다르다. 나는 대상을 관찰하고 대상은 관찰하는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 존재론적 지위에서 관찰하는 내가 대상보다 우위를 점한다. 그런데 나는 한줌 머리카락을 잘라 잠든 대상에게 바친다. 한줌 머리는 대상의 머리가 아니다. 관찰하는 나의 머리이다. 만약에 잠든 대상의 머리를 자른다면 대상은 깨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을 잘라 바치는 행위는 헌신의 의미이다. 잠든 대상이 시간이 지나 잠에서 깨어난다면 잘린 머리를 보고 놀랄 것이다. 잘린 머리는 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 깨어난 대상은 잘린 머리를 보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언어로 해석해야 한다. 최초의 당혹스러운 순간은 시적 시간으로 변한다. 시적 시간은 종교적 시간이고 예술적 시간이다. 현상과 내가 충돌하면서 융기하는 수직 이미지를 갖는다. 이 작품은 작가 유성훈이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송가이다. 나는 모든 사람을 관찰하지만 우위의 존재 지위를 갖지 않겠다. 다만 발견의 계기를 선사해서 시적 시간, 즉 비일상적이고 예술적인 시간으로 초대하겠다는 의지다.

 

   <편지(A Letter)>는 이케아(IKEA) 매장에 진열된 상품들 쇼룸을 사진으로 찍고 편집하고 작가의 시들을 화면에 기재한다. 이케아 매장은 서울의 풍경 사진을 쇼룸 벽에 연출해놓아, 매장이 이케아 상품들로 가득 찬 일상 생활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불에 덮인 것처럼 편안하다. 사람들은 이 편안한 가상 공간을 자기 집으로 옮기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욕구를 소비하게 된다. 그러나 유성훈 작가는 가상과 욕구가 지배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최초의 사람들은 자연과 분리되지 않았다. 이미지 역시 실재와 분리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로 내재되었기에(in-sist) 마술적이었다. 이들의 언어는 시적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시로 설명했다. 마치 벌레(虫)들의 작업(工)이 무지개(虹)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술적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서 문자를 개발했다. 문자는 역사를 만들었다. 역사는 이성이다. 이성은 사람을 마술 밖에 살게 한다. 그래서 자연으로부터 분리된다. 탈존한다. (ex-sist) 이성은 기술을 만들었고 기술은 문명을 만들었다. 기술 시대 문명은 최초의 사람들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그러나 행복할 수 없다. 기술 문명 시대의 인간은 설명으로 살기 때문이다. 결코 시로 살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진정한 느낌의 시(authentic poetry)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정교해지는, 설명으로 흐르는 역사이다. 인간의 역사는 밀봉되었던 비누가 거품으로 사용되다가 닳아 없어지는 이야기를 닮았다. 진정한 느낌에서 어처구니 없는 허무함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닮았다.

 

   유성훈 작가는 <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한다. “누군가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말하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지만, 그래도 우리는 시를 말해야 한다고. 인간의 본질은 시에 있다고.” 작가의 <아이폰 드로잉> 연작도 비슷한 선상에 있다. 첨단 제품을 대표하는 아이폰은 우리의 생활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켰고 우리에게 정보를 주었다. 그것은 나의 한 몸처럼 되었다. 처음에 아이폰을 만났을 때 그것은 시적 체험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것은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폰이 깨지거나 전지가 소진되면 우리는 고통스러워한다. 나의 우주가 아이폰 속으로 빨려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폰이 다시 작동되기 전 며칠을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나 아이폰에게 빨려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폰이 작동되기 전에 그것은 거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폰이라는 사물에게 상호주관적으로 얽매인다. 그것에게 끊임없이 의존하며 영향 받는다. 

 

   우리에게 확고부동한(unchangeable) 자아가 있기보다 늘 그러한(constant) 자아가 있을 뿐이다. 아니, 늘 그러한 듯 보이는 자아가 있을 뿐이다. 끊임없이 변화한다. 우리는 상호주관적으로 영향을 받는 존재다. 무엇 하나 알 수가 없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시적 언어로 세계와 타자에 대답해왔을 뿐이다. 작가는 아이폰이라는 현재 문명사에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지문 드로잉을 남긴다. 지문은 시대를 초월해서 언제나 관통했던 휴먼 터치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기술과 자본은 결여하고 있는 진정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객관화시킬 수 없다. 그리고 알 수도 없다.”